유대감과 눈치의 인생 역학

인생과철학 / / 2020. 7. 22. 18:21
반응형

유대감이란 무엇일까?

 

뭔가 익숙하게 나누는 공감대 같은거랄까?

 

이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이건 누군가에게는 이런 식의 말로 치환되어 들릴수가 있다.

 

"남의 눈치를 보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Public한 콘텐츠에서는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사세요!" 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다.

 

"남들 눈치 안보고 사는 삶이라니.. 너무 멋있어요!! 쿨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살면서 남의 눈치를 잘 파악하는 사람과, 남의 눈치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더 "끌렸는가?"

 

남의 눈치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남의 시선을 배제하는것또한 부정적인 극단에 존재할 수 있는 편견과 아집의 산물일 뿐이다.

 

 

블로그에는 왜 존칭을 써야 하는가?

 

야 왜 존칭을 써야하는거냐? 어?

 

이런식으로 말하면 건방져보이기 때문이다.

 

건방져 보이면 뭐가 안 좋은가?

 

일단 사용자경험이 박살난다.

 

읽는 사람이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결국 열심히 글을 써놓고도 읽히지 않는 글이 된다.

 

읽히지 않는글은 마치 책장속 일기장속에 써놓은 글처럼 인지되지 못하게 된다.

 

만약 블로그로 뭔가를 얻고 싶은 사람이였다면 그런 자세가 원하는것을 얻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유대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있으면 진짜 돈으로 헤아릴수 없이 좋은 무언가가 있다.

 

세상이 지금과 달랐다고 생각해보자.

 

 

뭐 판타지 소설속에나 나올법한 갑자기 세기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슨 헌터가 레이드를 해서 지구의 종말을 막아야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그런 세상이 되더라도 "눈치껏" 행동하면 된다.

 

유대감이 느껴지는 행동을 하면 된다.

 

 

어려운것은 함께 해결하고, 쉬운것은 혼자서 클리어하고.

 

남들이 싫어할만한 짓을 가능하면 하지 않고.

 

동료를 만들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그냥 그렇게 '인간답게' 존재하면 된다.

 

그게 인간의 인생이다.

 

그게 인간의 인생 역학이다.

 

 

지금보다 누릴것이 한없이 작았던 전란의 세상에도 인간은 그렇게 존재했었다.

 

그렇게 하나의 의미들을 경험하며 잊혀졌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더라도 판단 근거가 될만한것이 바로 그런것이다.

 

완전히 상대적인 가치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생각의 찌꺼기일 뿐이지만,

 

 

거꾸로 이녀석은 완전히 상대적인 역학을 가진 가치이기 때문에

 

어떻게 세상이 뒤집혀도 그에 맞춰 변화한다.

 

디스플레이의 크기와 사용자 관심사에 맞춰 유동적으로 변하는 반응형 엘리먼트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것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외롭지 않은 스토리를 만들면서 살아갈 수 있다.

 

지금 시점에 이글을 보는 당신들은 얼마나 삶에 유대감이 있는가?

 

인생을 숫자로만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 역시 이곳은 곧 숫자가 된다.

 

숫자는 무자비하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숫자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당신들은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묻자.

 

계속해서 여기에 이상태로 존재하고싶은가?

 

그게 정말 당신이 원하던 삶이였나?

 

 

 

나는 아니다.

 

여기가 엔딩은 아닌것 같다.

 

 

그래서 나아갈 것이다.

 

 

세상에는 실체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의미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다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한 인생 살면서 비슷한 환경속에서 살아가더라도

 

결국 스스로 느끼는 감정적 경험이 모두 다르다.

 

 

죽고 죽이는 감정이 가득한 삶으로 채워갈지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감정이 가득한 삶으로 채워갈지

 

그것은 온전히 당신이 내린 스스로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물론 나는 약자가 될 생각은 없다.

 

적어도 한때는 무자비하게 행동할 생각이다.

 

하지만 내 눈은 더 높고 환상적인 곳을 향한다.

 

 

진흙탕을 구를 것이지만, 언젠가는 그 흙을 털어내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싶은 순간이다.

 

 

난 착하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나쁘다.

 

하지만 결국은 조금더 따뜻한 곳에서 살고 싶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미 이런것들은 포기한지 오래인가?

 

 

포기하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 게임이 모두 허상에 불과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삶이 좀 나아지는가?

 

지금 누리는 그런것들은 혹시 역치에 도달하여 별 감흥이 없지는 않은가?

 

 

 

인생이란 결국 받아들이는 감정적 경험의 총합이다.

 

많이 짓밟는게 당신의 행복이라면 그리 하여도 상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자문해보자.

 

눈치껏 생각해보라.

 

 

당신의 삶엔 유대감이라는게 존재하는가?

 

 

당신은 두려움과 경외, 경계의 대상인가?

 

아니면 이해와 존경, 애착의 대상인가?

 

 

존경, 이해, 애착만큼 허상에 가까운것은 없다.

 

 

허나 당신은 기꺼이 동의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납득이 어려운 사람인가?

 

 

당신의 호환성은 윈도우98인가 윈도우10인가?

 

 

혹시 외롭지는 않은가?

 

외로움이란 감정도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럼 당신이란 사람은 로봇인가 인간인가.

 

인간다운 오판을 전혀하지 않아서 행복한가?

 

인생이 그렇게 점철되는게 정말 원하던 모습인가?

 

 

 

남들이 웃는 일에 웃을 수 있는가?

 

남들이 화나는 일에 공감이 되는가?

 

남들이 슬퍼할때 그 슬픔이 느껴지는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문장으로

 

고장난 공감능력을 강력한 무기나 성취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가?

 

이건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묻는 질문이다.

 

 

분명히 나는 지금 어딘가 고장나 있다.

 

 

하지만 내 끝은 그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그리고 냉정하다.

 

생각해보면 진짜 ㅈ같은 곳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라도

 

이렇지 않은것처럼 만들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눈이 우리의 눈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이 허상과 관념의 소산일 지라도

 

결국 그들은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느끼며 살아간다.

 

 

 

언젠가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고장난 공감대와 유대감이

 

영원히 불씨를 잃고 잿더미가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아마 꽤 긴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당장 물렁해지면 안될 것이다.

 

 

전쟁은 잔인하니까.

 

일단은 살아남는게 먼저일 것이다.

 

 

 

전쟁은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의 끝은 아니였으면 한다.

 

 

그래서 당신들이 디디는 땅과 내가 디디는 땅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나를 그렇게 의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난 곧 이곳을 떠날 사람이니까.

 

 

그냥 이런 사람도 이렇게 지나갔었구나 하고 잊혀지길 원한다.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